2024.11.04
친구가 고른 책
“그야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솜사탕같은 책. 나는 김초엽 작가와 비슷한 문체들의 글을 솜사탕같은 글이라고 명명하겠다. 달짝지근하고, 둥실둥실 부유하며, 밀도가 낮아 손에 쥐기 어렵다는 뜻이다. 읽고 나니 500페이지 가량이 된다고 믿기에는 어렵다. 체감으로는 200-300페이지 정도이다. 실제로 ‘28’과 거의 비슷한 분량이지만 실제로 28이 읽는 데 시간이 2배 정도 걸렸다. 개인적으로 나는 김초엽 작가의 글이 밀도가 낮다고 느껴진다. 읽기에는 부담이 없지만, 그래도 기대한 대서사시가 없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결말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범람체와 함께하는 삶을 강요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결단코 나의 뇌 일부분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적응하지 않는 너는 잘못된 것이다. 하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음. 그리고 작가가 이 범람체들을 이민자로 은유하여 글을 썼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그러면 나는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닌데, 이 소설 속 범람체를 반대하면 현실 속 이민자들까지 반대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단 말이지. 이 은근한 강요가 꽤 불쾌했다. 이것마저도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난 완벽하게 넘어간 것이 되겠군.
친구들과 이 책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제프에게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 이제프가 철저한 악인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가 이제프 보고 이v제프 아니냐고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의 웃음 사건)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친구의 댓글과 그 답글 (노션이 이렇게 똑똑해요)
친 :
나는 지금 다시 봐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설령 작가가 정말 그런 의도로 글을 썼다고 해도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범람체들은 인간과 공존할 수 없잖아.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의 자아를 해체해 죽음과 다를 바 없게 만들고, 이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지성이 있다지만 태린을 제외하고는 소통할 수 없고, 그들은 인간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들만의 ‘공존’ 방법만을 강요하고 내세우잖아. 난 바이러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범람체가 바이러스와 뭐가 다르지? 범람체를 멸하지 않으면 내가 멸해지는데. 그 ‘공존’ 방법이 더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나의 자아와 의식을 침범하는 방법인데 그게 이민자들이랑 같다고 할 수 있나? 범람체들은 약자의 입장도 아니고(오히려 지구 표면 전체를 차지하고, 인간들을 공격하며 몰아넣는 강자의 입장이지), 이민자들처럼 소통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면 내가 해체되고, 의견을 조율할 수도 없고(범람체와 태린의 입장에서는 조율할 수 있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난 글쎄… 인간들의 입장과 주장은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공존’이라는 이름 하에 일방적으로 인류를 지하에 계속 몰아넣고는 몇 가지 거래를 하는 게 조율이라고 할 수 있나?), 공존 불가능한 존재들이잖아. 이민자들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아. 굳이 이민자들에 대입할 수 있다면… 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처럼 느껴져. 인류의 공간에 범람체가 침범하고, 인류를 죽이고, 인류는 이에 지하로 피하며 내몰리고, ‘공존’을 할 수 있게 됐다지만 여전히 범람체들만의 주장이며 인간의 주장은 고려되지 않은 채 받아들이기를 강요받고… 이런 점이 팔레스타인의 영토에 유대인이 침범하고 자신들의 영역이라 주장하며 그들을 학살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주 작은 영역으로 내몰리는 점이랑 다름 없다고 느껴지는데. 지금 당장 팔-이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학살을 멈춘다고 해도 여전히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고립되어 있을 거고, 이스라엘은 압박을 풀지 않을 거고, 그 사이에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이스라엘이 제시하는 조건에서 몇 가지 거래를 하는 것이 ‘공존’이고 ‘정당한’ ‘거래’이자 ‘합의’고, ‘조율’인가? 이렇게 비교될 수도 있는 범람체를 반대하는 게 과연 일반 전체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것이 되는가? 난 그렇다고 생각 안 해.
나 :
정성어린 댓글 고맙다. 내 감상문을 이렇게까지 읽어주다니 감동이야. 내가 작가가 범람체들을 이민자라고 가정했다고 말한 건 모든 설정들이 이민자의 특성과 부합한다는 게 아니라 커다란 개념이 일치한다고 생각한 거야. 세세한 부분들을 따지면 당연히 이민자들과 범람체들은 다른 존재이지. 내가 불쾌하다고 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야. 크게 보면 이민자들로 볼 수 있는데, 세세하게 따져보면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작가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는 설정을 세세하게 묘사해서 보통 독자들은 범람체 수용을 거부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나도 그랬고. 그런데 이게 결국 멀리서 바라보면 이민자를 거부하는 사람이 된단 말이야. 나는 이게 불쾌했던 거고. 또 나아가 이런 생각도 들어. 이민자들과 범람채의 가장 큰 차이점인 공존하기 위해 신체가 변형되고 뇌의 일부를 공유한다는 게 어떠한 은유는 아니었을까? 작가가 "이민자들이 들어옴으로써 인해 신체의 일부같은 것들이 변형되고, 뇌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 같은 상황이 와도 정말로 이민자들을 수용할 수 있겠어? 네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뺏어갈 수도 있는데." 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어. 작가가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서 일부러 이런 설정을 넣은 게 아닐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을 이 책에 빗대는 것은 작가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 같아. 책에서는 인간들이 결국 범람체들을 받아들였는데, 만약 팔-이 상황을 책에 대입하면 작가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게 되어 버리잖아? 상황은 일부 비슷할 수 있어도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와는 동떨어진 것 같아.
친 :
네 댓글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어떤 부분에서 이민자를 상징한다고 느꼈는지, 그리고 이민자의 특성과 그 이민자들이 들어옴으로써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느낌을 어떤 식으로 은유했는지는 알 것 같아. 범람체가 인간의 자아를 해체하고 침범한다는 점이 특히 거의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민자들을 받는 것을 이질적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이 해체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해 보여. 이렇게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과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여러 부정적인 인상과 영향이 이민자와 같은 결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는 범람체가 이민자들로 비유될 수는 있지만 그 지점 외의 것들 때문에 나는 이민자랑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이민자들로 상징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민자들 여러 특성 중 약자성이 꽤 큰 특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앞선 댓글에서 썼다시피 범람체들은 전혀 약자의 위치에 있지도 않잖아. 그 외의 차이도 댓글에 언급했었고... 음, 그래. 너는 이런 점들 때문에 완전히 이민자들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을 반대하는 게 이민자 자체를 거부하는 것들을 느껴져 불쾌한다고 썼잖아? 나는 더 나아가서 애초에 처음부터 범람체≒이민자 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에 빗대는 게 작가의 의도에 어긋난다는 점 인정해. 나도 좀 너무 나갔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난 작가의 의도는 그 아니었을지라도 여전히 범람체가 강자의 입장을 띄고, 인간들이 느끼기에는 인간을 공격한다는 인상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보여. 내가 느끼기에는 그래. 사실 이 댓글을 쓰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는다. 범람체가 이민자의 주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민자로 상징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민자의 또다른 주요 특성들과의 차이점과 상반 지점, 그로 인해 오는 불쾌감에 (네가 언급한 그 불쾌감이겠지) 절대 이민자를 상징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좀 뒤죽박죽인 것 같다. 그래도 토론할 때도 그렇고 네가 다시 정리해준 독서록과 댓글에서도 그렇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어. 우리가 여러번 말했다시피 우리는 끼리끼리라ㅋㅋ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많았는데 파견자들에서는 여러 지점에서 생각이 달랐던 것 같아. 그래서 오히려 내가 생각지 못한 여러 의견을 알게 되고, 내 생각도 검토할 수 있어서 유익하고 재밌었어.
나 :
나에게도 네 말대로 범람체의 강자성이 이민자와의 유사성을 고민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었어. 강자성을 제외하면 이민자와 정말 비슷한데, 강자성이 너무나도 큰 특징이고... 고민하다가 결국 난 강자성의 영향력을 의식적으로 약화시키고 작품을 바라봤지. 강자성을 다시 제대로 직시하고 글을 떠올려 보면, 네가 이민자와 범람체의 유사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 속의 이민자들은 항상 약자이니까. 나도 사실 독서록 쓸 때 제대로 정리해서 쓰지 않아 글도 생각도 명확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너랑 댓글로 주고받으면서 제대로 마무리한 것 같아 시원하다! 솔직히 너처럼 나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ㅋㅋ 그래도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무언가들을 조금이라도 잡아챈 것 같아 아주 상쾌하다. 그리고 말인데, 내 블로그에 우리의 댓글토론을 올려도 될까? 난 IT 기업들을 신뢰하지 않아 항상 이중 · 삼중으로 백업을 해 놓는데, 댓글도 백업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물론 개인정보는 올리지 않습니다!
친 :
내 신상을 다 까발리는 게 아닌 이상 얼마든지 올려라. 아주 건설적인 토론이었어.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2) | 2024.11.23 |
---|---|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1) | 2024.11.22 |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0) | 2024.11.22 |
10대를 위한 세계 분쟁지역 이야기, 프란체스카 만노키 (0) | 2024.11.22 |
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리 (0) | 2024.11.22 |